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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르의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서평, 라이프니츠 예정조화설 풍자와 일상적인 행복의 추구

된장찌개냠냠 2023. 3. 13.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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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시대 작가 볼테르의 풍자 소설 <캉디드>

소설은 다양한 사건들의 연속이다. 그 사건들은 즐거울 수도 혹은 나쁘거나 슬픈 일일 수도 있다. 또한 작가가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는가에 따라 비극적인 사건이 희극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며, 그 반대 역시 가능하다. <캉디드>에서는 유럽-아메리카 여행 과정에서 보통 사람이라면 단 하나도 견뎌내기 힘든 불행하고 비극적인 사건들이 수 차례 연달아 일어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독자는 그런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슬프다거나, 너무 비극적이라는 생각에 빠져들지 않게 된다. 이는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의 불행을 서술하는 작가의 서술방식과 그 의도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캉디드>에서는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을 각각 한 명씩 내세우면서 그들의 철학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작가는 희극적 글쓰기의 방식을 통해 낙관주의를 풍자하는 듯 보이지만, 작품 어디에서도 비관주의에 대놓고 힘을 실어주지는 않는다. 이 책을 읽을 때, 볼테르가 어떤 방식으로 인물들이 겪는 불행한 사건들을 서술하고 있으며, 작가가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를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고 있는가를 함께 살펴보면 좋을 것이다.

 

 

캉디드 또는 낙관주의 제목에 담긴 의미와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 풍자

우리는 제목에서 많은 것들을 유추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제목에는 낙관주의(l’optimisme)가 분명히 들어가 있다. 이는 작가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는 하나의 단면으로, 작가가 당대에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던 철학적인 논쟁, 특히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목적의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캉디드(Candide)는 순진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로, 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우리는 낙관주의를 믿는 순진한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낙관주의를 비판하고자 함을 예상할 수 있다.

 

작품에는 각각의 철학의 입장을 대변하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팡글로스 선생은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최선의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주장하며 낙관주의를 대변한다. 이에 반해, 작품의 중반에 등장하며, 팡글로스 선생의 의견에 반대하며 염세주의의 입장을 가지고 철학적 논쟁을 지속하는 인물은 바로 마르탱이다. ‘순진한’ 캉디드는 어린 시절 팡글로스 선생에게 받은 교육의 영향으로 낙관주의를 기본적으로 믿으며 수많은 불행한 사건들을 겪게 된다. 하지만 끊임없는 사건들 가운데 과연 이 모든 불행들이 최선을 위한 것일까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는 작가의 서술방식에 더해져서 큰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캉디드에 나타난 희극적 글쓰기의 서술방식

이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다음과 같은 것들을 공감할 것이다. 먼저, 등장인물들이 겪는 불행에 대해서 그다지 큰 연민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너무 비극적이거나 너무 과장되어서 사실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반복해서 나타나는 불행 속에서 자신의 철학만을 고집하는 등장인물들에 대한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이런 희극적 글쓰기와 풍자의 방식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의도를 드러낸다. 몇 가지 예시를 살펴보자.

 

그들의 구조를 받은 몇몇 주민은 그런 재해를 당했으면서도 최대한 맛을 낸 점심식사를 대접해주었다. 하지만 확실히 즐거운 식사는 아니었으므로 식사에 초대된 사람들은 눈물로 목을 적시면서 빵을 먹었다. 그러나 판그로스는 사태는 그것 이외엔 있을 수 없다고 잘라 말해 모두를 위로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모두 최선의 상태이기 때문이오. 리스본에 화산이 있다면 그 화산은 다른 곳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오. 또 사물이 현재 있는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있을 수가 없지 않소? 그것은 모든 것은 잘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오”

 

위의 본문은 리스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상황이다. 그런 참혹한 광경을 눈앞에서 봤음에도 불구하고 팡그로스 선생은 그것이 최선으로 되어있다고 주장하며 ‘충족이유’를 찾고자 한다.

 

“현세의 재산은 모든 사람의 공유물로서 저마다 그것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 판그로스 선생님이 증명해 주신 바 있습니다. 그 코르도리에회 수도사는 이 원리에 따라 틀림없이 우리가 마지막까지 여행을 계속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남겨놓았을 겁니다. 아니, 뭐라고요? 그럼 키네공드 양, 수중에 한 푼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겁니까?”

 

이 부분은 캉디드의 팡그로스 선생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를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장면 중 하나이다. 그는 모든 재산은 모든 사람들의 공유물이므로, 돈이 어떻게든 있을 것이라는 낙관주의의 입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런 반복되는 비극과 이에 대응하는 주인공들의 자세를 묘사한 작가의 글쓰기 방식은 낙관주의를 맹신하는 캉디드와 팡그로스 선생의 순진한 모습을 보여주며 당시 유행하던 철학적 쟁점인 낙관주의를 비판하고자 한다.

 

그러나 작가의 희극적 글쓰기의 의도가 단순히 낙관주의를 비판하고 풍자하는데서 그치지는 않는다. 이 작품을 읽는 독자는 작가의 희극적 글쓰기 방식과 이야기 전개에 대해서 폭소를 하거나 웃음을 터뜨린다기보다는 엷은 웃음을 띠거나 쓴웃음을 짓게 된다. 폭소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철학적 담론에 지배된 순진한 주인공처럼 자신도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끔 만든다.

 

 

낙관주의와 비관주의 그 사이에서 캉디드가 취하는 자세

처음 제시했던 문제로 돌아가야 할 시기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낙관주의를 비판하고 비관주의를 취하는 것일까? 이는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의식과 비교해서 살펴볼 수 있다. 작가의 주제의식은 널리 잘 알려져 있듯이 형이상학적인 담론들에 빠져있기보다는 일상적인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잘 나타나있다.

“옳습니다. 백 번 맞는 말씀입니다.”
캉디드는 대답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는 뜰을 가꾸어야만 합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캉디드는 여전히 낙관주의를 주장하는 팡그로스 선생의 주장에 대해 위와 같이 대답한다. 놀라운 것은 캉디드가 여전히 팡그로스 선생의 말에 옳다고 반응하는 것이다. 동시에, 비극적인 사건들에 끊임없이 노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옆에서 비관주의를 주장하는 인물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끝까지 소설 어느 부분에서도 비관주의나 염세주의의 편을 들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마르탱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 비관주의를 펼치는 것이, 지나치게 낙관주의로 치우쳐있는 주인공을 조금 더 중립적인 입장으로 균형을 맞추는 정도에서 그침을 확인할 수 있다.

 

낙관주의와 비관주의에 대한 논쟁은 작가의 주제의식과 함께 살펴보면 비로소 분명해진다. 소설에서 모든 인물들의 공통점은 행복해지기를 원하며, 행복했던 시기가 있었다는 점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희망’이 필요하다. ‘희망’이 없는 삶은 마치 끊임없이 이어지는 컴컴한 터널을 걷는 것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캉디드가 수많은 불행을 겪고 염세주의 적인 성향을 띠는 것이 당연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팡글로스 선생의 의견에 동의를 표하는 것은,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지나친 낙관주의에 빠져 일상의 행복을 포기하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작은 희망을 간직하며 살아가고자 했기 때문이다.

 

반면, 비관주의의 입장을 취하면 행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작가가 끝까지 캉디드로 하여금 낙관주의에 대해 의심하게끔 하지만, 비관주의에 동조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 까닭이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낙관주의에 대한 비판을 함과 동시에 그런 철학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메시지를 동시에 전달하고 있다. 결국,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지나친 낙관주의가 아닌 행복 추구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희망을 가지되, 가능한 영역에서의 일상적인 행복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볼테르의 철학적 관점 - 일상적인 행복의 추구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는 아직까지도 사람들이 취하는, 대표적인 삶을 대하는 자세이다.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라고 낙관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어차피 안될 텐데 해봐야 무슨 소용이냐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든 한 극단으로 치우친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현재의 삶에 충실하지 않으며 미래에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인지에 집중하면서 일상의 행복을 놓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캉디드에 나타난 글쓰기 방식과 낙관주의와 비관주의 중 볼테르가 선택하고 싶었던 철학적인 관점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봤다. 결국 볼테르는 독자들에게 일상적인 행복의 추구라는 메시지를 남기며 소설을 마무리하고 있지만 ‘희망’을 잃지 말기를 당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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